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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G'/하루 한편 글쓰기

마스크2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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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 로부터 입수된  Benjamin Balazs 님의 이미지 입니다

한국은 소고기가 참 비싸구나. 아이용으로 산 소고기 안심 랩핑 포장에 붙은 25000원이라는 가격표를 보며 새삼 한번 더 놀란다. 아이는 커피 테이블에 놓은 아이패드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요즘은 변신 로봇 만화에 푹 빠져있다. 몇 달 전만 해도 Car. Bus, 네 바퀴 달린 것들만 좋아하던 아이가 차가 로봇으로 변하지 않으면 별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대로인 것 같은데 아이의 변화는 눈에 띈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보면 시간이 가는 걸 안다는 말이 이 뜻인가 싶다. 결국 싱가포르는 한국에서의 입국을 막았다. 호주도 막았다. 필리핀은 나라 전체가 락다운이 되었다. 아이가 쓰지도 않는 그 마스크는 한 장 한 장 매일 가격이 오른다. 정가로는 구할 수도 없고 인터넷에서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만 판매가 시작됐다. 미리 좀 사둘걸...... 쓰지도 않지만 그래도 싱가포르에서 가져온 아이 마스크가 매일 씌우는 전쟁을 하다 소비되어 많이 남지 않았다.

 

매섭던 날씨가 지나가고 제법 봄볕이 들어 아파트 야외놀이터로 마스크를 못 씌운 아이를 데리고 나갈 수 있는 시기가 오자, 남편은 들어오고 싶어도 들어 올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 아이패드 앞에 앉은 아이 옆에 나란히 앉아서 아이의 입만 바라보며 밥을 떠 먹인다. 그렇게 안보여주던 아이패드를  하루에도 몇 시간씩 보여주게 되었다. 티브이 없이 어떻게 아이를 키웠던 걸까?어린이집은 대기 순위가 안되어서 처음부터 생각도 없었고, 그나마 보낼려고 했던 사립 어린이집 버전인 놀이학교도 문을 닫았다. 아이와 둘이서 24시간을 집안에만 있다 보니 두어 번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소리를 질러도 보고 밤새 울다 다음날의 또 다른 실랑이가 이어지고 소리는 지르지 말자라는 마음으로 아이를 방치 아닌 방치도 해보았다. 스트레스가 산후우울증이 왔던 시기와 비슷한 정도로 극도에 다 다르기 시작할 쯔음, 공적마스크라는 새로운 단어가 익숙해지고 다시 인터넷 마스크 가격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립 어린이 집에서 문을 열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노란 버스는 매일 아침 아파트 주차장 입구에 섰다. 울며 불며 나와 떨어지려 하지 않는 아이를 버스에 실으며 얌전히 양 어깨에 V자로 안전벨트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스윽 훑어본다.. 우리 아이만 마스크를 안 쓰고 있었다.

아침 오전 8시 반에 오면 노랑 버스는 여지없이 아이를 데리러 온다. 오후 두시 반이 되면 아이는 집에 온다. 그 여섯 시간의 아이의 공백은 삶의 질을 높이기 충분했다. 집을 정리하고 아이를 낳고 얻은 디스크 치료를 할 여유가 생겼다. 여전히 아이가 마스크를 착용을 거부해 마음이 조금 무거웠지만 이 자유마저 빼앗기면 다시 소리 지르는 엄마로 돌아갈 것 같아서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다. 들어오라고 설득했을 때 한국에 입국 못한 남편은 그저 마음대로 하라고 이미 육아를 도울 수 없음에 발언권을 잃었다. 우리는 그가 쓸데없는 걱정들로 입국 시기를 놓친 것을 주제로 이미 한번 크게 싸운 후였고,, 남편은 확진자가 꽤 안 나오는 싱가포르에서도 집 밖을 안 나가고 혼자 자가격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게 남편 다운 선택이었다. 최고급 마스크들은 그 집에 수집된 채, 나갈 일은 없으리라. 남편과 나의 결정으로 끝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시아버지가 슬쩍 문자를 보냈다. 요즘 어린이 집에서 맞고 오는 아이들도 뉴스 보면 나오더라, 요즘 시기가 이런데 어린이집을 보내는게 안전한지 모르겠다. 에둘러 불편한 마음을 표현하신다.

친정과 워낙 교류가 없는 나 인지라, 돈독한 남편과 시부모님들의 관계가 부러운 적도 또 그 안에 끼려 노력한 적도 있었으나 그런 사이에서 주고받는 안부와 걱정들을 감당할 힘이 없어 결국 나는 그 언저리만 맴도는 중이었다. 너무 가깝지도 그렇다고 서운하다는 소릴 들을 정도로 멀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그 노력들은 꽤 결실을 얻는 듯했다. 연말 휴가가 오면 시댁에서 한 달씩 지내기도 하고, 남편이 연락을 잊고 있는 기념일들을 먼저 챙기기도 하고 남편이 장기 출장을 간 시기에 셋이서 함께 여행도 가기는 하나, 물리적으로 우리는 호주와 싱가포르라는 거리가 있기에 잘 유지되는 듯하였다. 물론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첫 손주의 탄생은 우리 가족끼리만 똘똘 뭉치는 교포의 성향을 여실히 보여주기 시작했다. 슬슬 일을 시작하려고 제동을 걸려는 나에게 마치 내 생각을 읽은 듯 아버님은 충고를 했다. 아이가 중학생이 될 때까지는 복직은 생각하지 말아라. 부탁도 아니고 그냥 명령이었다. 그 한마디는 한국 입국을 못한 후 싸웠던 우리 부부 싸움에 다시 한번 불을 질렀다.

아버님 말씀 나한테 지금 실수하시는 거야.”

옛날 분이어서 그래. 이해해.”

뭐가 옛날 분이야. 내가 알기론 어머님도 꽤 오래 일을 하셨는데!"

손주가 너무 이뻐서 그런 거야.”

아가씨 아이 낳으면 두고 보겠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만약 육아를 위해 엄마가 일을 그만둬야 한다는 말이 며느리에게만 한정된 말이라면, 난 아버님 안 봐.. 못 볼 거야.” 거침없이 말을 뱉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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